<차표 한 장 2500원, 윤희일 지탄역장의 지탄역 여행>
일요일인 지난 5일 낮 12시 대전역.
‘지탄역 주세요’. 매표창구 직원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2500원을 내니, KTX 표와 똑같이 생긴 표를 한 장 줬다.
12시 40분 대전 출발, 오후 1시 1분 지탄 도착. 딱 21분의 기차여행이다.
2009년 여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1주일 내내 타고 여행할 때와 비교하면 ‘극과 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 출발 시간까지 40분이 남았다.
이 ‘40분’은 내가 미리 준비해 둔 ‘행복의 시간’이다.
대전역에서만 즐길 수 있는 행복, 그 행복의 순간….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역 플랫폼은 단순한 승강장이 아니다. 헤어짐이 있고, 만남이 있고 그 속에 애잔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장소다.
특히 대전역은 우리에게, 단순한 역 이상의 그 무엇을 담고 있다.
대전역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대전역 0시 50분’으로 유명한 가요 ‘대전브루스’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가락국수’를 회상할 것이다.
‘대전역 가락국수’는 그 자체가 추억이다. 나의 추억이고, 대전 시민의 추억이고, 우리 국민의 추억이다.
얼마 전부터 대전역 플랫폼에 다시 등장한 가락국수는 늘 나에게 행복을 한 아름 가져다 준다.
뜨끈한 가락국수를 받아드니, 온몸에 엔돌핀이 확 돌았다.
사실 나는 예전의 그 맛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왠지 예전의 그 맛은 아닌 듯 하다는 느낌, 왠지 면발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나는 좋다.
여기에 대전역이 있고, 가락국수가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좋다.
2500원 짜리 기차표 한 장을 손에 쥐고 가락국수를 먹으며 기차를 기다릴 수 있어 좋다.
대전역에서 가락국수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요즘 대전에 오는 외지 손님들에게 이 가락국수를 꼭 먹여 보내곤 한다.
‘대전역의 그 옛날 가락국수를 제대로 살려봤으면….“
그런 꿈과 함께 말이다.
12시40분, 정확히 기차는 왔다.
무궁화호는 그 옛날 통일호와 같은 느낌이다. 아니 비둘기호 같은 느낌도 든다.
서민의 냄새가 나서 좋고, 느려서 좋다.
기차가 서면, 시골 아낙 몇 명이 한 보따리 짐을 들고 내릴 것은, 딱 그런 느낌이 들어서 좋다.
차에 올랐다.
객차 안은 예상과 달리 깨끗했다.
요즘 KTX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씩은 무궁화호도 타볼 것을 권유한다.
그 옛날의 기차에서 느낄 수 있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예전에 비해 한결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비록 21분 동안의 여행이지만, 나만의 좌석도 있다.
‘2호차 24호석’
차창은 녹색 그 자체이다.
나는 봄이나 초여름의 기차를 특히 좋아한다.
차창을 스치는 그 녹색의 향연이 눈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뚝’
차 안으로 그 녹음 한 덩어리가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
대전을 스르르 빠져나간 무궁화호 열차는 옥천역을 지나고 바로 지탄역에 멈춰 섰다.
하행선은 매일 이 시간, 딱 한 차례 선다. 상행선은 오전 7시17분에 딱 한번 섰다가 간다.
나를 포함해 모두 2명이 내렸다. 무인역이기 때문에 따로 개찰구도 없다.
지탄역은 ‘내 역’이다.
내가 현재 역장(명예역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나는 늘 마음속으로 ‘내 역’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내부 벽에는 무인역장으로 활동해온 나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코레일의 홍보대사인 영화배우 김민종과 찍은 사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코레일 측이 무인역, 지탄역을 홍보하기 위해 걸어둔 것이다.
대합실의 의자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바로 ‘역장 업무’에 들어갔다.
지탄역장의 주된 업무는 청소다. 특히 화장실 청소가 중요하다.
화장실은 우리 역의 얼굴이라는 생각으로 변기와 세면대를 부지런히 닦았다.
누군가, 이 무인역을 찾았다가 깨끗한 화장실을 보고 감동한다면….
역 주변을 돌며 쓰레기를 줍고, 이런 저런 시설을 점검했다.
‘이상 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준비해간 녹차와 간식을 먹으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방울토마토와 김밥, 그런 것들을 천천히 집어먹으면서
책을 한 권 거의 다 읽고 자리를 떴다.
역사 밖은 태양이 뜨거웠다.
올 때는 기차가 있지만 갈 때는 없다.
굳이 기차를 타고 대전에 가고 싶다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한다.
처음부터 작정한 걷기와 버스 여행을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옥천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2~3㎞ 쯤 걸어야만 한다.
‘느리게 느리게’
유럽 어디서 시작됐다느는 ‘슬로우 무브먼트’가 떠올랐다.
느린 세상, 그 속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상황에서 나만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도저히 볼 수 없던, ‘작은 것들’, ‘낮은 곳에 있는 것들’, ‘속에 감춰진 것들’이 하나둘 눈으로 들어왔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 막 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벼다.
예전과 달리 줄이 곡선이다.
그 옛날 사람이 모내기를 할 때는 기다란 줄을 대고 모를 심었기 때문에, 모들이 군기든 군인들처럼 줄을 딱 맞춰 서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모를 기계로 심는다.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벼의 줄은 곡선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예쁘다.
이름 모를 풀, 나무 그런 것들과 대화를 나눈다.
“너 나 알아?”
그들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알아. 그런데 이름은 모르겠는데….”
이원초등학교 지탄분교장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분교장’이라는 말이 왠지 ‘무인역’과 짝을 이루는 느낌이 들었다. 정겨웠다. 둘 다 작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지탄역하면 뭐니 뭐니 해도 금강 상류가 떠오른다.
금강 상류는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한 방향(하류 쪽)으로 향하고 뭔가를 잡고 있다.
그들은 올갱이를 잡고 있었다.
“다리는 시원하고 목은 뜨거워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한 아낙은 신이 나서 죽겠다는 표정이다.
길가에서 뽕나무를 만났다.
까만 오디가 몇 개 매달려 있다.
그 옛날 추억이 떠올라.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한 입 깨물었다.
한 입 가득, 고향의 그 맛이 번졌다.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감꽃도 봤다.
감꽃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또 그 옛날 고향 집 앞마당이 떠올랐다.
시골 버스정류장에서는 정확히 1시간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을의 한 노인이 여유럽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의 페달은 ‘여유’, 그 자체였다.
이런 걸 보고 ‘느림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슬로운 무브먼트’는 유럽 어느 나라가 아니라 우리네 시골마을에서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염소도 만나고, 똥개도 만났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염소가 신기했지만, 염소는 낯선 외지인인 내가 더 신기한 듯 했다.
드디어, 옥천으로 가는 시골버스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옥천장날이다. 옥천장은 5일과 10일 선다.
승객과 운전기사는 모두 아는 사이다. 그러고 보니 나만 외지인이다.
장에 가는 사람들, 모두가 즐겁다.
“둘째 딸은 시집 갔나…. 나이가 꽤 들었을텐디….”
정겹다. 가는 말을 타고 간 정(情),이 오는 말을 타고 다시 왔다.
그들의 말에서 정이 느껴진다.
버스가 옥천 읍내로 들어와 정차하자, 모든 승객이 내렸다.
옥천장은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왔다.
시골장터는 예나 지금이나 좋다.
장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고향의 향기가 난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모두 얼굴 표정이 좋다.
뭔가에 ‘쩔어(절어)’ 있는 도회지 사람과는 다르다.
‘저 분들처럼 늙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 나이 50, 특히 남자 나이 50을 넘으면 진짜 얼굴이 나오고, 거기에는 과거의 인생이 그대로 반영된다는데….
평생 사기를 친 사람은 사기꾼 얼굴이 나오고…, 저기 저 시골장터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처럼 평생 착하게 산 사람은 저렇게 착한 얼굴이 나온다는데….
빨강 앵두를 조금 샀다.
영락없는 그 옛날 그 맛이다.
싱싱한 오이를 보니 한 입 베물고 싶어져 4개를 샀다. 그 중 하나를 뚝 잘라 바로 해치웠다.
싱싱한 오이가 타는 갈증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시골장터’하면 역시 ‘가축전’이다.
똥개와 고양이와 닭과 오리가 뜨거운 태양을 피해 졸고 있다.
예쁜 똥개 한 마리 가격이 4만5000원이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 하나 있다면 몇 마리 데려가 키우고 싶다.
똥개와 눈인사를 나누고, 장터를 나왔다.
장터를 나오니 낯익은 대전시내버스가 보였다.
교통카드로 요금을 냈다.
도회지 대전의 교통카드는 현실로 넘어오는 ‘증명서’ 같았다.
버스의 출입구는 ‘꿈’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경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경계’다.
농촌과 도시의 경계….
꿈과 현실의 경계….
대전역에서 버스를 내리니 ‘현실세계’가 펼쳐졌다.
거리를 가득 메운 차와 사람….
이게 바로 도회지, 대전이다. 오후 6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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