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종-주말기획

일본 편의점의 진화, 도대체 어디까지?

 ‘노인 요양서비스 편의점’, ‘생맥주 마시는 편의점’, ‘노래방 편의점’, ‘쌀 농사 짓는 편의점’, ‘여행사 편의점’, ‘면세점 편의점’ ….

 일본의 편의점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미래시장의 변화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조차 편의점이 나가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신의 방향과 폭이 파격적이다.

 

로손이 지난 3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구치(川口)시에 문을 연 ‘노인요양(개호)서비스형 편의점’. 편의점 한 구석에 ‘노인 요양(개호)서비스 상담창구’가 마련돼 있다.


 많은 일본인들은 1974년 5월15일 도쿄(東京)도 고토(江東)구에서 세븐일레븐 1호점이 일본 첫 편의점으로 문을 연 이 날을 ‘사회의 새로운 변혁이 시작된 날’로 기억한다. 1964년 10월1일 도쿄~오사카(大阪) 구간에서 고속철 신칸센(新幹線)이 개통되면서 일본의 교통문화가 일대 혁신을 이룬 것처럼 편의점의 등장은 일본의 유통문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일본인들의 삶의 양태를 새롭게 바꿔놓았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편의점을 빼놓고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편의점과 집과의 거리는, 전철역과의 거리와 함께 집값, 집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정도다.


 현재 일본 전역에는 무려 5만여개의 편의점이 있다. 인구 성장이 사실상 멈춘 상황에서 편의점 수가 더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편의점의 단순한 양적 성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각 편의점 업체들은 경쟁에서 도태하지 않기 위해, 미래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고령자를 잡아라. 놓치면 모두 죽는다.”


 전체 인구의 26%(약 3300만명)가 65세 이상의 고령자인 ‘노인대국’ 일본에서 이 구호는 단지 편의점 업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업계, 거의 모든 기업이 고령자의 지갑을 열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돼 있다.

 그러나 ‘거리를 다니다 보면 개나 고양이와 함께 산책하는 노인 밖에 없는 나라 같다’는 어떤 외국인의 평가처럼, 이미 ‘고령자 천국’이 된 일본의 골목길 상권에서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내야하는 편의점 업체들에 이 구호는 더욱 절체절명의 느낌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각 업체들은 고령자를 고객으로 잡아두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로손은 지난 3월 노인 요양(개호)서비스 상담창구를 갖춘 편의점을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구치(川口)시에 열었다. 일본에서 이런 편의점이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로손이 지난 3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구치(川口)시에 문을 연 ‘노인요양(개호)서비스형 편의점’의 상담창구에서 한 노인이 노인요양서비스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4시 가와구치시의 주택가에 있는 로손 노인요양서비스형 점포. 70대 여성이 이 점포의 ‘개호상담’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창구의 전담 직원에게 다가가 재택노인요양서비스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로손과 함께 이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노인요양서비스 전문기업 위즈넷의 직원이 여성에게 집에서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재택요양서비스’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로손이 지난 3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구치(川口)시에 문을 연 ‘노인요양(개호)서비스형 편의점’의 매장 한켠에 노인용품전문코너가 개설돼 있다. 여기서는 노인용으로 생산된 기저귀, 탈취제 등을 판매하고 있다.

 

 편의점 한 켠에는 노인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여기에는 기저귀와 탈취제 등 70여가지의 노인용 상품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노인용품을 구입한 70대 남성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한 곳에 몰려 있어서 편리하다”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창구에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로손은 이런 형태의 점포가 좋은 반응을 얻자 오는 8월 사이타마현 다른 지역에 ‘노인친화형 편의점’ 2호점의 문을 열고, 향후 3년 안에 30개 점포를 새로 내기로 했다. 로손은 이와 별도로 고령자 손님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반의약품을 취급하는 점포를 현재 100개에서 앞으로 5년 안에 1000개로 늘린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로손이 지난 3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구치(川口)시에 문을 연 ‘노인요양(개호)서비스형 편의점’의 간판에 ‘개호(요양)상담’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편의점은 원래 점포를 찾아오는 손님에게 물건을 파는 것을 주업으로 한 업태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배달업에도 뛰어들고 있다. 이 역시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층을 겨냥한 것이다. 세븐일레븐의 경우는 도시락배달 서비스만으로 이미 66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회원 중 60%가 60세 이상의 고령자일 정도로 고령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일본 편의점 업체들이 이 같은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급격한 고령화 추세와 함께 주요 고객층이 고령층으로 급격하게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블일레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994년 편의점을 찾는 손님의 11%가 50대 이상의 중·노년층이었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31%로 3배나 늘어났다. 이에 비해 20대 미만의 젊은층 비율은 1994년 59%에서 지금은 33%로 크게 줄었다.


■“내 땅이 넘치면 남의 땅으로 쳐들어간다”

 5만여개의 점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 편의점 업체들이 다른 업종의 시장에 도전장을 내미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카페·노래방·술집 등 다른 업종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편의점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절약’을 기본으로 해온 편의점이 ‘시간소비’의 거점으로까지 진화하는 등 편의점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상황이다.


 서클케이산쿠스는 지난해 도쿄 주오(中央)구에 카페 결합형 편의점(K’s cafe)을 개점했다. 이 편의점과 같은 문을 사용하도록 돼 있는 카페에서는 커피 등의 음료는 물론 간단한 식사도 팔고 있다.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러 가는 김에 쇼핑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입구는 1개만 뒀다. ‘빨리 빨리’식의 ‘시간절약’이 기본 이념인 편의점에 ‘여유’를 컨셉트로 한 ‘시간소비형’ 업종을 결합시킨 사례다.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업체는 앞으로 수도권 등을 중심으로 3년 동안 이런 형태의 점포를 100개정도 열 예정이다.

 


지난 15일 오후 도쿄(東京)도  스기나미구의 세븐일레븐 점포 앞에 상품배달용 소형 전기차가 주차돼 있다. 세븐일레븐은 도시락배달 서비스만으로  66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패밀리마트는 노래방과의 협업에 나섰다. 지난해 노래방 전문 업체와 함께 도쿄 오타(大田)구에 ‘편의점·노래방 일체화형 점포’를 열었다. 편의점에서 산 상품을 노래방으로 그대로 가지고 가서 즐길 수 있도록 점포를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 점포가 문을 연 이후 이후 편의점 매출이 기대 이상으로 늘었다며 업체 측은 반기고 있다.

 

 

패밀리마트가 지난해 노래방 전문 업체와 함께 도쿄 오타(大田)구에

  문을 연 ‘노래방 편의점’.  아사히신문 웹사이트 캡처

 

 미니스톱은 술집 시장까지 파고 들었다. 이 편의점은 퇴근 후 간단히 한 잔을 즐기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이 시끄럽고 가격이 비싼 이자카야(일본식 술집)에 가는 것을 꺼린다는 점에 착안해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니스톱이 지난해 9월과 지난 2월 잇따라 문을 연 ‘시스카’는 편의점 매장 안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내놓는 것은 물론 매장에서 구입한 안주거리를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전자렌지와 편안하게 앉아서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패밀리마트는 대형여행업체인 HIS와 손잡고 여행상품을 판매하기로 하고 현재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로손은 의류업체인 유니클로와 제휴해 인테넷으로 주문한 옷을 편의점에서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시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일본인들은 편의점을 통해 자동차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서클케이산쿠스는 지난 15일 아이치(愛知)현 지역의 점포에서 ‘카 셰어링’ 서비스를 시작했다. 회비를 낸 지역 주민들이 일정한 요금을 내고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최근 일본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이 급증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패밀리마트와 로손 등은 일부 점포를 ‘면세점’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여권을 제시하면 8%의 소비세를 그 자리에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외국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농사짓는 편의점까지 등장, 관심을 끌고 있다. 전국 23곳에서 농장을 직접 운영해 채소와 과일 등을 조달해온 로손은 쌀의 명산지인 니가타(新潟)에서 올부터 쌀농사를 시작했다. 로손은 지역 농가들과 함께 영농법인을 만든 뒤 고시히카리 등 지역의 명품 쌀을 쌀을 생산, 매장에서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15일 밤 도쿄(東京)도 네리마구의 ‘로손100’점포가  야간 영업을 하고 있다. ‘100엔 숍’의 개념을 적용해 소규모 포장한 야채·과일 등을 100엔대에 파는 ‘로손 100’은 한때 편의점의 변신을 상징하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최근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속속 폐점되는 운명을 맞고 있다.

 로손이 ‘100엔(약 900원) 숍’의 개념을 적용해 소형 포장한 야채·과일 등을 100엔대에 파는 ‘로손 100’의 경우, 한때 편의점의 변신을 상징하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외면을 이기지 못하고 폐점의 운명을 맞게 되는 등 실패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우송대 호텔외식조리대학 이시모토 준코(石元淳子) 교수는 “술집·커피숍 등 외식업종까지 넘보고 있는 편의점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신해 갈지 예견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그러나 일본의 편의점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밀착형 서비스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갈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말했다.

 

편의점이 ‘재해복구’의 선봉에

 

 일본은 지진·화산분화·태풍·집중호우 등 자연재해가 연중 끊이지 않는 나라다. 도쿄(東京)를 포함한 일본 수도권 일대에서 향후 30년 이내에 ‘규모 7’ 수준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70%에 이른다는 전망까지 나와 있다.

 언제 어디서 대형 재해가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이 편의점이다.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편의점과 그것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는 배송망을 잘 활용한다면 재해복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1년 3월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지진 피해 지역의 편의점들이 주민들에게 물과 음식 등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생명줄’ 역할을 한 사례가 있다.

 일본 정부는 지진 등 대형 재해가 발생하는 경우 편의점의 상품 배송망을 재해복구에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재해가 발생할 경우 전국의 모든 편의점이 확보하고 있는 정보를 한 곳에 모은 ‘재해시 편의점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각 편의점 업체가 보유하고 있는 상품 배송용 화물차량을 통해 확보하는 도로정보다. 편의점 배송차가 재해 발생 이후 실제 운행을 하면서 확인한 도로정보를 바탕으로 소방차·경찰차·구급차 등의 동선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 이들 화물 차량을 통해 통신망이 모두 끊긴 상황에서도 재해지역 내부의 각종 정보를 모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스템에는 재해지역 안에서 영업을 하는 편의점의 상세한 정보도 게시해 재해주민들이 생필품 구입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내년부터 이 시스템을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