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던 2004년 도쿄 집에서 구독하던 신문에 “수도의 기능을 지방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지가 들어 있었다. 수도 이전 추진 단체는 전단지에서 “과밀상태의 수도권을 살리고 지방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도쿄에 집중돼 있는 수도의 기능을 지방으로 대거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의 수도이전 논의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다.
세종시 첫마을의 멋진 야경
비슷한 시기, 한국사회는 달랐다. 2003~2004년 한국 사회는 수도이전 논쟁으로 뜨거웠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수도의 지방 이전이 서울과 지방을 모두 살릴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라면서 행정수도 건설 사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노무현 정부의 이 사업은 기득권 세력의 반대 의견과 충돌하면서 한국사회를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헌법적 관습이라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관련 법률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행정수도 건설은 무산됐다.
하지만 수도의 과밀화와 지방의 공동화라는 숙제를 동시에 안고 있던 한국 사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행정도시(세종시)를 만들어 청와대·국회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성과를 올렸다. 공기업 등을 전국의 혁신도시로 이전해 지역발전을 이끌게 하는 시도도 착착 진행했다. 지금도 행정도시와 혁신도시 건설로 인해 업무효율이 떨어진다는 등의 주장이 여전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도시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이 기득권 세력들의 거센 저항 속에서도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된 배경에는 수도 기능의 지방분산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굳은 신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혁신적인 발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수도와 지방의 균형 발전을 바라는 지방사람들의 염원이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최근 ‘지방살리기’가 국가의 핵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일본에서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예전에 나온 수도 기능 이전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수면 아래로 들어갔지만, 도쿄에 있는 일부 행정기관만이라도 지방으로 이전해 지방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지난달 26일 열린 일본 내각부의 지방살리기 관련 회의에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지방창생담당상은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전국 지자체에 밝혔다.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 도시인 교토(京都)시가 문화청과 관광청을 유치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상당수 지자체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내각부 회의에서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지방이전 사업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게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오랜 세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수도 기능 이전 논의처럼 이번 행정기관의 지방이전 논의도 공전할 수 있음을 예견하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수도 기능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1992년에는 관련 법률(국회 등의 이전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사회 발전 과정을 보면 한국은 한 발 앞서간 일본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 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한국이 서울의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주장에 연연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성공사례는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진정으로 행정기관의 지방 이전을 이루고, 이를 통해 지방을 살려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한국의 성공 사례를 한번 꼼꼼하게 뜯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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