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고하쿠> 보면서 조용히 지내려고 해요.”
일본인들의 연말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연말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매년 12월31일 밤, TV가 있는 가정 중 절반 가까운 가정은 채널을 NHK에 맞춰놓고 오랜 세월 ‘국민프로그램’의 자리를 차지해온 <고하쿠우타갓센(紅白歌合戰)>을 본다. 오후 7시15분에 시작돼 오후 11시45분까지 계속되는 이 프로그램은 가수 등 연예인들이 남·녀로 팀을 이루어 노래대결을 펼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고하쿠우타갓센의 단골 출연자였던 가수 김연자
<고하쿠> 앞에 ‘국민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이 붙는 데는 다른 그 어떤 방송도 넘볼 수 없는 높은 시청률도 한 몫을 한다. 1963년 12월31일 방송된 <고하쿠>의 평균시청률은 81.4%였다. 일본에서 시청률 조사가 처음 실시된 1962년 이후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5개 민방의 거센 도전 속에 <고하쿠>의 시청률은 조금씩 하향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도 4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민방들이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하쿠>의 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룬 적이 없다. 2013년 12월31일 방송된 <고하쿠> 2부의 시청률은 44.5%로 그해 일본 최고였다.
고하쿠우타갓센에 출연한 바 있는 가수 보아
일본의 연예인들에게 있어서 <고하쿠>에 출연하는 것은 사실상 꿈을 이루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것만으로 이미 성공을 공인받게 된다. 일본의 주요 신문은 물론 다른 민방들까지 방송 개시 몇 주 전부터 <고하쿠>에 출연하는 가수 등에 대해 보도를 하곤 한다.
일본 최고의 연예인들이 펼치는 이 잔치에는 빼어난 노래실력을 자랑하는 한국 가수들도 많이 출연한 바 있다. 특히 ‘한류’가 붐을 이룬 2000년대 들어 한국 가수의 <고하쿠> 출연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됐다. 김연자(2001년), 보아(2002∼2007년), 동방신기(2008∼2009년) 등 한국 가수들은 2001년부터 2009년까지 9년 연속 <고하쿠> 무대에 올랐다. 2010년에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한류’가 최고조에 이른 2011년에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 등 총 3개팀이 출연했다.
일본 땅에서 온갖 차별 속에 서러운 생활을 해온 재일동포와 일본 거주 한인 등은 한국 연예인들이 나오는 <고하쿠>를 보면서 흐뭇한 연말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고하쿠>의 모습이 달라졌다. 한국 연예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2014년 12월31일 방송된 제65회 <고하쿠>의 출연가수 51명(그룹 포함) 중에서 한국 가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3년 연속으로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다.
<고하쿠> 무대에서 한국 가수를 볼 수 없게 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냉각된 한·일 관계’에서 찾는다. 최근 만난 일본 스포츠신문의 한 연예담당 기자는 “상당수 한국 가수(그룹)의 일본 내 인기는 여전하다. 그런데도 <고하쿠>에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뻔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 연말 도쿄돔에서 열린 소녀시대·빅뱅 등의 콘서트에는 회당 5만명의 팬이 몰리는 등 인기가 여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재일동포들의 삶과 생각을 취재하기 위해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을 다녀왔다. 거기서 만난 재일동포들의 꿈은 소박했다. 한국과 일본이 보다 친하게 지내는것, 그리고 일본의 ‘국민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고하쿠> 같은 곳에서 한국 가수들을 보다 자주 볼 수 있게 되는 것들이었다. 광복 7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2015년에 한·일 양국 사이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단 재일동포들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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