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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2014.11.13 /일본 정계의 '묻지마 세습'

 “총리를 지낸 사람의 딸이니까 당연히 그만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요. 그의 아버지를 믿듯이 그를 믿는거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전 총리(사망)의 딸인 오부치 유코(小淵優子) 전 경제산업상이 지난달 20일 정치자금 의혹으로 물러난 뒤 그의 지역구인 군마(群馬)지역의 한 인사는 지난 선거에서 오부치에게 표를 던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오부치의 사직 이후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미야자와 요이치(宮澤洋一) 신임 경제산업상이 다시 각종 정치자금 의혹에 휩싸인 뒤 한 히로시마(廣島) 출신 인사는 기자에게 “미야자와 가문의 사람이니까 믿고 찍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미야자와 경제산업상은 큰아버지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로부터 히로시마지역의 정치적 기반을 이어받았다.

 요즘 오부치와 미야자와는 일본 정치계의 독특한 문화이자 동시에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세습정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두 사람은 권력의 정점인 ‘총리’ 경험자를 아버지나 큰 아버지로 두고 있다. 또 아버지나 큰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국회의원이 됐고,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경제산업상 자리에까지 올라 ‘정치자금 의혹’의 대상이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실 아버지나 큰 아버지가 닦아준 이들의 정치가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총리 재직 중 뇌경색으로 작고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회의원이 된 오부치의 경우 2000년 첫 당선 이후 내리 5선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34세의 나이로 저출산 대책 각료로 취임, 전후 최연소 입각 기록을 세웠다. 정치자금 의혹이 일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유력한 첫 여성 총리 후보’로까지 거명했다.

 그러나 이번 정치자금 사태로 드러난 ‘세습정치인’ 오부치 유코의 실상은 상당수 일본 국민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정치자금 의혹이 터진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정치자금과 관련해 “어릴 적부터 믿고 지내던 사람에게 자금관리를 맡겼다. 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고 실토했다. 이후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30년 넘게 같이 일해온 비서가 정치자금이 들어있는 금고의 열쇠를 쥐고 흔든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국민들 속에서는 “자신의 정치자금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나라의 경제정책을 책임진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일본 정치계에는 이런 세습정치인이 부지기수로 많다. 2012년 12월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480명 중 부모나 조부모가 국회의원을 지낸, 이른바 ‘세습 의원’이 무려 114명(24%)에 이른다는 통계가 나온 바 있다.

 

 현 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자민당 소속 각료 18명 가운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 등 9명도 세습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요즘 일본에서는 이런 세습정치가 정치인들의 자질을 떨어뜨리고, 정치의 수준을 추락시킨다는 지적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정치인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닦아놓은 길을 손쉽게 걸어가게 되면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의 원인은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그의 가문 내력을 보고 뽑아준 일본 국민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생활하다보면 일본인들은 이미 형성돼 있는 권위와 전통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스포츠계나 연예계 등 각계에 ‘절대화된 영웅’이 많은 것도 이런 성향과 무관치 않다.

 일련의 정치자금 의혹으로 ‘묻지마 세습’의 폐해가 온천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일본 국민들이 향후 선거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자못 궁금해 진다. 당장 연내에 중의원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궁금증이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