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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2014.05.15/일본의 수신료 거부운동

2014.05.15

 

 1963년 12월 31일 저녁 9시 5분. 일본에서는 지금도 ‘국민 프로그램’으로 일컬어지는 NHK의 <고하쿠우타갓센(紅白歌合戰)>이 시작됐다. 가수 등 연예인들이 남·녀로 팀을 만들어 노래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다.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온가족이 집에 둘러 앉아 <우타갓센>을 보면서 한 해를 보내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연말 풍습으로 정착돼 있다. 이날 3시간 동안 진행된 <우타갓센>의 평균시청률은 81.4%(간토지구 기준) 였다. 10세대 중 8세대가 이 프로그램을 지켜봤다는 얘기다. 일본에서 시청률 조사가 처음 실시된 1962년 이후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일본 방송사 ‘불멸의 기록’이다.


 민방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우타갓센>의 시청률이 매년 조금씩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인기는 요즘도 30~4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식지 않고 있다. 그동안 많은 민방들이 자극성 짙은 격투기프로그램 등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때마다 처참하게 패퇴했다. 지난해 12월 31일 1부와 2부로 진행된 <우타갓센>의 시청률은 각각 36.9%와 44.5%였다. ‘44.5%’라는 2부의 시청률은 지난해 일본 최고의 기록이다. 지난해 하반기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궜던 TBS의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도 최고시청률 42.2%로 <우타갓센>의 벽을 끝내 뛰어넘지 못했다. 공영방송 NHK에 대한 일본 국민의 ‘신뢰’를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시청률 조사에서 NHK가 매일 아침 15분씩 방송하는 아침드라마<하나코와 앙>이 24.8%로 1위를, 같은 방송의 <뉴스>가 19.4%로 2위를 각각 차지하는 등 NHK 프로그램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은 지금도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NHK를 대하는 일본 국민들의 시선과 태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계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모미이 가쓰토 NHK 회장이 마련해 줬다. 그는 지난 1월 ‘종군위안부 문제는 전쟁지역에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쏟아내는 등 ‘정권 편향적’ 행동을 보이면서 한국·중국 등 주변국은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후에도 각종 망언을 시리즈로 내밷던 그는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지난달 ‘국민의 자산’인 NHK의 전파를 ‘개인의 도구’처럼 활용해 ‘사죄’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동에 실망한 시청자들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싼 수신료(지상파·위성방송 동시 시청시 2220엔)를 꼬박꼬박 내오던 일부 시청자들은 ‘NHK를 감시·격려하는 시청자 커뮤니티’ 등의 단체를 통해 회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회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수신료 납부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신료 납부를 거부하고 있는 한 시청자는 “NHK의 수장이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상식’과 ‘균형’을 상실한 발언을 일삼아 NHK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최근 KBS의 수신료 인상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한국에서도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KBS 간부의 발언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진 KBS와 현 정권과의 관계는 우리 국민들의 KBS에 대한 신뢰를 근저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정권은 물론 KBS와 NHK 등 두 나라의 공영방송들은, 전파는 결코 ‘권력의 소유물’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또 공영방송 전파는 오로지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만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두 방송이 지금부터라도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방송에 나선다면, ‘수신료 납부 거부 투쟁’이나 ‘수신료 인상 반대 여론’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거나, 누그러질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