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이었지만, 정말로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지진은 하루에도 100차례 이상 반복됐다. 진동이 심할 때는 땅바닥에 앉아 기사를 써야 했다. 잠을 이루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익숙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진은 아무리 해도 내 몸과 친화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어지러웠고, 공포는 커졌다. 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의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멀리 이국 땅에서 온 취재진들을 반갑게 맞아줬다. 집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한 노부부는 슬픔을 애써 삼키면서 지진 당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현장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모든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피난소에서 만난 80대 여성은 “이게 다 자연의 조화이며 나의 운명”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피난소에서 목격하게 되는 질서정연함은 더욱 놀라웠다. 1000명이 몰려 있는 피난소에 400명분의 주먹밥만 왔는데도 이재민들은 조용히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릴 뿐이었다. 자신에게 주먹밥이 배정되지 않아도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어떤 이는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식량이 충분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고, 어떤 이는 “이 정도라도 마련해준 것도 고마운 일”이라고 반응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현장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당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피해가 났지만 현장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 당시 쓰나미로 가족과 수많은 지인을 잃은 80대 할머니는 “한국에서 취재하러 왔다”는 나의 말 한 마디를 듣고 2시간 동안 피난소 곳곳을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의문이 이번 취재기간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답은 “늘 있는 일”이라는 한 이재민들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지진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생활 속의 일”이라고 했다. 지진은 절대로 특별한 것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진에 쓰나미, 태풍 심지어는 화산 분화까지 거의 모든 자연 재해를 수시로 겪게 되면서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이번 지진이 워낙 강해 주택의 피해가 컸지만 현장의 호텔이나 빌딩·관공서 등 상당수 건물은 진도 6~7의 강진에도 온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로 꼼꼼하게 잘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다 일본의 ‘모노쓰꾸리(もの造り, 물건 만들기) 정신’ 덕분 아니겠어요. 뭘 하나 만들어도 제대로, 안전하게 만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현지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은 일본의 모노쓰쿠리 정신은 지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했다. 수시로 지진이 발생하는 땅을 조상으로 둔 덕분에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확실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이룬 것도 따지고 보면 지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지금 이 글은 19일 후쿠오카(福岡)에서 도쿄(東京)로 가는 고속철도 신칸센(新幹線) 안에서 쓰고 있다. 1964년 개통된 신칸센은 일본의 모노쓰쿠리 기술과 장인정신이 결집된 것이다. 1174.9㎞ 구간을 열심히 내달리고 있는 신칸센이 오늘따라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대지진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의 일본관이 많이 바뀐 느낌이 든다.
여전히 한·일 양국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을 둘러싼 무거운 주제들을 잠시 뒤로 하고 재난현장에서 목격한 일본과 일본인들은 나에게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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