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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하토야마는 큰절 사죄, 아베는 사죄 거부?

 지난 13일 알고 지내던 일본의 한 언론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큰절’이 갖고 있는 의미를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때 큰절을 하는지, 큰절을 할 때의 마음가짐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물었다.

 

 직감적으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가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큰절을 하고, 일본의 과거 잘못을 사죄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다.

 

 ‘앉거나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등을 굽혀 머리를 조아려 하는 절’이라는 큰절의 사전적 의미는 물론 하토야마 전 총리의 큰절 사죄를 본 사람은 국적에 관계 없이 그의 진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도 전달했다.

 그 즈음 일본 TV의 정보·보도프로그램들은 하토야마 전 총리의 큰절 사죄를 경쟁하듯 다뤘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토야마 전 총리의 사죄를 ‘돌출행동’이라는 시각으로 전달했다. 한 프로그램의 출연자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과거 소속 정당이 ‘인연을 끊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행동을 진심이 담긴 사죄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접하기가 어려웠다.


 

 방송 진행자·출연자들은 일반 국민까지도 하토야마 전 총리가 왜 한국에 가서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사죄를 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사회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한국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전 총리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심리가 느껴졌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큰절 사죄 이후 이틀이 지난 14일 일본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아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가 발표됐다. 그동안 아베 담화의 작성 과정 등을 지속적으로 살펴온 필자에게 담화의 내용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해서는 안된다’는 부분이었다. 이는 사실상 더 이상의 사죄는 거부하겠다는 선언으로 느껴졌다.

 역대 담화에 비해 양이 크게 늘어났다는 담화를 아무리 읽어봐도 아베 총리가 과거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토야마 전 총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하는 모습을 접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아베 담화 발표 이튿날부터 일본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아사히신문 등 일부 언론이 “이런 담화는 낼 필요도 없다”면서 강력히 비판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 국내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그만하면 됐다”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으로 흘렀다.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의 핵심표현이 담화에 들어간 것을 긍정적인 평가의 이유로 들었다. 담화를 한 번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단어가 모두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도, 그래서 ‘진심’ 같은 것은 거의 담겨있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데도 ‘긍정 평가’가 우세했다. 심지어 일본의 각 언론이 담화 발표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건 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간은 원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배척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게 ‘인지상정’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그 표정과 행동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던 하토야마 전 총리의 사죄는 애써 외면해 버리고, 그 어디에서도 ‘진심’을 찾을 수 없는 아베 총리의 담화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본 사회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전후 70년을 맞은 일본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미래지향’을 내세우면서 과거를 외면하는 리더를 따라 다시 그릇된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인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