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10월의 일이다.
일본의 공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은 정권의 방침에 따라 연금투자 기준을 대폭 바꿨다. GPIF는 당시 국내 및 해외의 주식투자 비율을 24%에서 50%로 올리는 대신 국채 등 국내 채권에 대한 투자비율을 60%에서 35%로 내렸다.
당시 일본의 상당수 언론과 국민들은 아베 정권과 GPIF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권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살리기 위해 국민의 노후자금에 손을 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엔저를 바탕으로 대기업의 수출을 늘리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인 아베노믹스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연금 적립금을 주식시장에 쏟아붓게 됐다는 것이다.
언론과 국민들은 또 연금기금의 손실을 우려했다. 그런 우려는 GPIF가 2015년에 입은 운용손실만 5조엔(약 51조원)대에 이르는 등 현실로 나타났다. 이후 아베 정권이 연금기금의 주식 투자 비율을 대폭 높인 것이 손실의 주된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국민들 사이에서 “아베 정권이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을 주식 투자로 날려버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GPIF의 운용실적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의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 등 시장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주가의 등락으로 수시로 변하고 있지만, 일본 국민들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 중에 아베 정권이 특정 개인이나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연금 적립금에 손을 댔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가 부양’이라는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책적 판단’이 연금에 손을 댄 이유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금 논란은 일본의 그것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이 최순실과 그 가족, 그리고 삼성이라는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보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있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삼성 편을 들어준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이 최순실을 지원한 것은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합병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등에 대한 지배력은 강화됐다. 합병 당시 최종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국민연금이었다. 국민연금의 찬성 없이는 합병이 물 건너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국민들의 노후자금으로 특정 기업이나 개인의 사익을 챙기려 했던 것이 사실일까. 삼성 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양사의 시너지효과와 미래가치를 위해 한 것이므로 최순실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또 합병 후 국민연금이 보유한 삼성물산의 주식가치가 하락한 것도, 평가시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손실을 봤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구심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당사자들에게 분명한 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노후자금에 누군가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정권 바로 세우기, 나라 바로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국가는, 사법당국은 국민의 노후자금을 둘러싼 의혹을 분명하게 해소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건드리려 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것을 도운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밝혀내 처벌해야 한다. 그게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이 추운 날에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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