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파원칼럼

국제사회의 골대, 늘 움직인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인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캐나다·멕시코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TPP가 자국 경제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협정에 온갖 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핵심파트너인 미국 쪽의 상황이 급변했다. 오바마의 뒤를 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하자마자 TPP 탈퇴를 선언해버린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런 상황에서 아베와 트럼프가 지난주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베는 이 자리에서 트럼프에게 강력한 항의를 해야 맞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12개 나라가 그 긴긴 나날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것을 하루아침에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한 번 해야 했다. 그러나 아베는 트럼프에게 TPP의 중요성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두 정상은 결국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TPP로부터 탈퇴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12개 나라가 목표점으로 하던 ‘골대’의 위치가 미국에 의해 바뀐 것이 분명한데도 아베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은 것이다.

 도쿄(東京)도 신주쿠(新宿)에는 도쿄한국학교가 있다. 일본 내 한국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이 학교는 공간이 부족해 입학 희망자를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안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도쿄도지사는 자국 고교가 쓰던 부지를 한국 측에 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선거에서 당선된 후임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는 “여기는 도쿄이고 일본이다”라면서 부지 임대 계획을 백지상태로 돌려버렸다.

 

 일본의 지자체 장이 바뀌면서 ‘골대’가 옮겨진 사례로 기록될 수 있지만, 한국 정부나 일본 내 한국인들은 고이케의 행위를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모처럼 개선 분위기를 보여온 한·일관계 등을 고려해 말을 아끼고 참았다.

 그런데 아베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지난해말 시민단체 등이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세운 뒤 보여준 아베의 태도는 지극히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한·일간에 진행되던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켰고,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를 귀국시켜버렸다. 아베는 또 2015년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10억엔(약 101억원)을 한국 측에 낸 점을 내세우면서 소녀상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했다.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으로 돌아온지 1개월이 지났지만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베는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이전 또는 철거해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아직까지 들어주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에 소녀상이 생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인 상황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부산소녀상 설치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다.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소녀상을 세운 것이다. 미국 정부가 TPP탈퇴를 결정한 것이나 도쿄도가 학교부지 대여 방침을 백지화한 것은 골대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민단체의 부산소녀상 설치는 골대 이동과 상관이 없다. 주체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베가 보여준 강경 자세는 향후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까지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한국에 새로 들어설 정권이 위안부 한·일합의를 없었던 일로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본때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우익들의 역사수정주의적 태도가 위안부 문제를 키워왔다는 점에서 이런 막무가내식 조치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베는 알아야 한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 측의 보다 명확한 사죄와 관련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소녀상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상황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