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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일본사회의 '얼굴 없는 폭력'

 일본은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사회인가. 최근 이런 의문을 품게 하는 일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 ‘돌출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선진국 일본’에서 자행되고 있는 ‘얼굴없는 폭력’의 사례를 들여다 보면 그저 놀랍고 무서울 뿐이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또 해고 위기에 놓여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신문사 재직 당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는 우에무라 전 기자에 대한 협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다.


 

 우에무라는 1991년 아사히신문 기자로 일할 당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사화하는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안팎에 널리 알렸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입 닫고 있으라’는 우익 등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한 것 정도다.

 

 그러나 그와 그가 재직 중인 대학에 가해진 ‘얼굴없는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에게는 “국적(國敵) 우에무라의 딸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협박문까지 그에게 날아왔다. 경찰은 우에무라의 딸에 대한 경호와 그가 재직 중인 대학의 입시장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지난해 초 시작된 협박이 올해까지 이어지자 대학 측은 경비 예산을 전년의 배 수준인 3200만엔(약 3억2000만원)으로 늘리는 등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바른 소리’를 대상으로 한 폭력의 사례는 또 있다. 이번 폭력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의 안보법 성립 과정에서 발생했다. 안보법에 대한 젊은층의 반대 운동을 이끌어온 대학생 단체 ‘실즈(SEALDs)’의 핵심 멤버인 오쿠다 아키(奧田愛基)가 최근 살해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오쿠다는 시위 현장에서 직접 마이크를 들고 안보법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국회의 안보법 관련 공청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거침없이 밝혔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가해자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범인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가족까지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일삼고 있다.

 

 일련의 사건을 접하면서 한 때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KY’라는 말이 떠올랐다. ‘KY’는 ‘구키 요메나이 히토(空氣讀めない人·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라는 말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것으로, 다시 말해 전체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눈치없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는 ‘KY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일본 사회 특유의 정서가 반영돼 있다고 볼 수있다.

 

 

 이런 식의 폭력은 아베 정권 들어 심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갈수록 힘을 키워가고 있는 우익세력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헤이트 스피치도 그런 행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우에무라나 오쿠다에 대한 얼굴없는 폭력도 우익 세력에 의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자민당의 소극적인 태도로 헤이트 스피치 규제 법안이 이번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주류 사회는 지금 이런 ‘얼굴없는 폭력’을 외면하고 있다.

 

 

 “말, 대화가 없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살해 협박을 당하고 있는 아들의 말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오쿠다의 아버지가 최근 한 이 말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는 상황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얼굴 없는 폭력’에 대한 강한 경고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