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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아베의 덫'에 세계가 걸려들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떤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시기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1주년, 3주년, 5주년, 10주년, 30주년, 50주년, 60주년 등을 특별하게 여긴다. 60주년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는 100주년이다. 70·80·90주년은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최근 ‘70주년’을 앞세운 ‘거대 이벤트’ 하나가 전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발표하기로 한 ‘전후 70년 담화’가 그것이다.

 사실 그의 70주년 담화가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등 2명의 전 총리가 전후 50주년과 60주년에 반성과 사죄의 메시지 등을 담은 담화를 낸 상황에서 ‘70주년 담화’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같은 자민당 출신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아베 담화를 왜 내는지 모르겠다”면서 “10년 단위로 그냥 담화를 낸다고 좋은 게 아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주변의 이런 차가운 반응을 특유의 ‘기획력’으로 제압하고 있다. 그의 기획력은 담화의 자문기구인 ‘21세기 구상간담회’가 발족될 때 이미 확인됐다. 이 자문기구는 지난 2월 첫 모임에서부터 일본 국내·외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영화의 제작발표회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베 연출’, ‘아베 주연’이 확정된 영화, 이 영화가 상영될 ‘아베 극장’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제작발표회를 딱 한 번만 여는 것으로는 성이 안 찼던 것일까. 자문기구는 수시로 회의를 열어 토론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언론에 흘렸다. 어떤 때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 ‘사죄’ 등 역대 정권의 담화에 담겨있는 표현을 마치 ‘흘러간 옛 노래’로 취급하는 것 같은 참석자의 발언이 흘러나왔다. 어떤 때에는 담화에 ‘미래지향’이라는 ‘새 노랫말’이 담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때마다 언론들은 춤을 추듯 보도 경쟁을 벌였고, 각국의 학자와 지식인들은 훈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이 흐르면서 담화같은 것에 대해서는 애초 관심도 없던 일반인들까지 ‘아베의 입’만 쳐다보는 상황이 됐다.

 머지 않아 그 ‘아베 극장’이 열린다. 내용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겠지만, 흥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 ‘1000만 관객 영화’를 만든 감독이 명감독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많듯이, 아베 총리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쌓을 수 있게 됐다. 이쯤되면 ‘탁월한 기획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흥행작 한 편으로 아베 총리는 향후 외교전에서의 칼자루를 자기가 움켜쥐는 ‘성과’까지 올렸다.

 ‘전후 70주년’이라는 시점에 발표하는 담화에서 ‘가해자’ 일본의 총리가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은 아베 총리가 이런 표현을 놓고 마치 맘에 드는 사람에게 떡을 하나씩 나눠주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할 수도 있는 ‘고약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반성’은 말하되 ‘사죄’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중국이 중시하는 ‘침략’은 담지만 한국 측이 기대하는 ‘식민지 지배’는 넣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예상도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베 총리가 놓은 거대한 덫에 우리 모두가 걸려든 느낌이다. 그 덫에 걸려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언론이고, 나 자신을 포함한 언론인은 아니었는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