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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2015.01.22 '헬기 추락'보다 더 끔찍한 '이지메'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기노완(宜野彎)시에 있는 오키나와국제대학은 미군이 주둔해 있는 후텐마(普天間)기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 대학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드넓은 후텐마기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레이 등 각종 군용 항공기가 활주로를 통해 이착륙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 오키나와의 오키나와국제대학에 보존돼 있는 미군 헬기 추락현장. 사고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추락 사고로 불에 탄 나무 아래에서 새로운 가지와 잎이 나오고 있다.


 이 대학 구내 한 켠에는 끔찍한 사고 현장이 하나 보존돼 있다. 2004년 8월13일 훈련중이던 미군의 대형 수송헬기가 추락해 승무원 3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이 사고는 태평양전쟁 막판 미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건설한 공항 등 후텐마기지가 주민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1995년 미군의 초등학교 여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 등 갖가지 폭행과 성폭행에도 시달려왔다.

 

 

오키나와국제대학의 옥상에서 바라본 미군의 후텐마기지. 각종 항공기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이 위험한 기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일을 겪어온 상당수 오키나와 사람들은 기노완시 도심에 있는 후텐마기지를 같은 현내 나고(名護)시 헤노코(邊野古)로 이전하겠다는 미국과 일본 정부의 방침에 찬성하지 않는다. 현 기지를 해안으로 옮긴다고 해서 그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고 보는 주민들은 미군기지를 오키나와현 밖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미군기지의 74%가 몰려있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기지의 현외 이전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런 주민들의 여론은 최근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일본 국내·외의 관심 속에 지난해 11월 치러진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는 미군기지의 현내 이전을 반대하는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가 당선됐다. 지난해 초 실시된 나고시장 선거에서도 현내 이전 반대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됐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중의원 선거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기노완시나 나고시 등 미군기지 이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지역의 선거구는 물론 오키나와지역의 4개 선거구 모두에서 미군기지의 헤노코 이전을 반대하는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주민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혁명’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오키나와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이 정도의 선거 결과가 나왔다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도 미군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하는 사업을 무작정 강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아베 정권이 최소한 현지 주민이나 그들의 대표인 지사 등과 대화를 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런 꿈은 무참하게 깨졌다. 아베 정권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냉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나가 지사가 지난해 말 취임 후 처음으로 도쿄(東京)를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등 정부의 핵심인사들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 사업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 전 오키나와 지사를 아베 정권이 환대하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자민당은 지난 8일 2015년도 오키나와 진흥예산안을 논의하는 회의에 이례적으로 오나가 지사를 초청하지 않았다. 결국 오키나와 진흥예산은 대폭 삭감되기에 이르렀다.

 오키나와는 물론 도쿄 등 외지에서까지 “아베 정권이 ‘말을 듣지 않으면 돈을 끊겠다’는 식의 협박을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요즘 오키나와 사람들의 입에서는 집단괴롭힘을 의미하는 일본어인 ‘이지메’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강한 일본’을 부르짖고 있는 아베 정권이 ‘작고 나약한’ 오키나와와 그 곳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따돌리면서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다.

 

 온갖 전쟁으로 점철된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